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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네 번째 이야기] 맑스주의 국가와 정치이론 강좌 2기를 소개합니다


맑스주의 국가와 정치이론 강좌 2기를 소개합니다

 

전국결집 교육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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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시작] 우리 앞에 놓인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관계 그리고 양자 모두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론이라는 수단은 실천으로 검증, 증명되어야 하며 실천은 이론에 입각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론과 실천 모두를 필요로 한다. 변화와 혁신의 토대, 가능성은 현재의 조건 속에 잠재되어 있다.

 ‘맑스주의 국가와 정치이론’이 2024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떠한 실천적 과제를 제기하고 있는지 강좌 소개와 영상을 통해 고민해보자. 이론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오늘을 사는 우리의 운동적 실천으로 돌파해보자. 철학자들은 그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맑스주의 국가와 정치이론에 대해 생소할 수 있는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간결하게 압축적으로 강좌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강좌는 원 저작을 읽고 그 내용을 원문에 충실하게 독해하고, 각자의 입장에 대하여 토론하자는 의도로 진행되었다. 아래에 이어지는 강좌 소개 글에는 해당 저작의 역사적 배경과 주된 쟁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만 소개 글에는 해당 저작에 대한 내용 토론, 요약 발제, 발제에 대한 토론 내용 등이 지면 상의 한계로 생략되어 있다.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단락별로 소개된 강좌 영상을 참고하면 된다. [편집자 주 종료]

 

 

 전국결집이 2022년 하반기 실시한 ‘회원교육을 위한 설문조사 결과보고’에 의하면 ‘전국결집이 우선해야 할 사업은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회원 교육 및 의식강화 사업’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두 번째를 차지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교육위원회에서는 다양한 강좌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중 하나가 ‘맑스주의 국가와 정치이론 강좌’였다. 당초 1기 강좌는 ‘노동당 당원교육기획위원회/청소년청년위원회(준)’에서 진행했었다. 이후, 전국결집 교육위원회와 공동주관하여 남구현 교육위원을 중심으로 2기 강좌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1기 강좌 요약

 

 1기 강좌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 선언(1848)’에서 출발해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까지 맑스-엥겔스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해서 자본주의가 등장하던 시기, 그리고 아직 구체제의 잔존 세력들이 남아있던 시기에 국가와 계급의 정치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구체제 지지자들은 왕정을 계속 주장 했었고, 새로이 등장한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면서 이제 공화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각 계급들이 정치적인 패권을 겨루는 과정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결정판으로서의 파리 코뮌에서의 이행기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그리고 각 계급들이 자기의 정치적 이해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파리코뮌은 약 70일 간의 경험이었지만, 노동자 국가가 어떻게 가능했었는가에 대한 정치적인 내용을 제공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노동자 국가가 취했던 경제 체제의 문제 등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행기 국가)라는 의제를 현실에서 제기한 의의를 가진다. 한편 고타강령 비판에서는 ‘라살레파’ 주장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 높은 단계에 대한 분석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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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4월 16일, 10년의 망명 생활 끝에 열차를 타고 러시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하여 군중 연설을 하고 있는 레닌의 모습> 

 

2기 1강 소개 [레닌]

 

* 강의 자료 : 국가와 혁명(1917),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1918), 민주주의와 독재(1918)

* 강의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9ac_Pgsa9jw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내고 소비에트 체제의 기초를 만들어내었던 이론가이자 현실 정치에 깊숙하게 관여하며 계급투쟁에서 큰 역할을 했던 지도자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전후 국가와 계급의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관점에서 소비에트 국가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새로운 형태의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가지고 논쟁을 조직했다. 레닌은 맑스-엥겔스를 충실하게 해설하면서도 국가와 계급의 정치를 러시아적 특수성 속에서 끊임 없이 재발견하고자 노력했다.

 레닌은 맑스-엥겔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당시 논쟁의 상대자였던 카우츠키 등의 기회주의자와 다른 한편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맑스-엥겔스 시기에도 비슷하게 등장했는데, 그 당시 오른쪽에는 라살레파가 있었고 왼쪽에는 블랑키주의가 있었다. 레닌 역시 우익 기회주의와 좌익 소아병, 무정부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논쟁의 중심에 섰다.

 

2기 2강 소개 [카우츠키]

 

* 강의 자료 : 프롤레타리아트 독재(1918)

* 강의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4HQc6J5zuy0

 

 레닌은 카우츠키가 맑스-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기본 관점을 벗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대비시키는 식으로 즉,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재’ 이렇게 양립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은 부르주아지들의 지배를 프롤레타리아트 지배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본다면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대칭 개념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고, 부르주아지의 독재가 부르주아 민주적인 형태를 지녔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적인 형태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역사에서는 차르의 폭압 정치라든지 또는 케렌스키 정부가 보이는 그런 이중적인 성격들 때문에 부득이하게 혁명적 폭력이 요구되었고, 그것을 가지고 민주주의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혁명 과정에서의 폭력적인 충돌-이것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폭력적인 충돌,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들도 다 폭력적인 행사를 했었다. 파리 코뮌의 경우도 폭력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게 있었지만 파리 코뮌의 권력이 세워지는 과정을 보면 보통 선거 등 민주주의를 더 완벽하게 실현했다. 그래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비어있는 부분이 오히려 파리 코뮌에서 더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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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민주주의에 입각한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 정부가 70일간 지속되었던 파리 코뮌. 1871년 3월 18일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광장 한켠에 건설된 바리케이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것은 부르주아들이 만들어 놓은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절차성이나 형식성을 넘어 내용을 채운다는 것이며, 그 형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형식을 더 완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현재의 선거제도를 바라볼 때도 ‘그런 문제들은 부르주아 선거니까 모르겠다. 우리는 혁명적 폭력을 통한 어떤 변화만 추구할 뿐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끝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2기 3강 소개 [스탈린]

 

* 강의 자료 : 레닌주의의 기초(1924), 레닌주의 문제에 관하여(1926),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1952)

* 강의 영상 : https://youtu.be/Ea7rU_Otoiw?si=TnUMeZ4MY4otGOoM

 

 레닌이 맑스-엥겔스 해설자 역할을 했듯이 스탈린은 레닌의 해설자로서 자기 나름대로 분석을 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주장을 하였다. 맑스-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인 이행기 사회와 공산주의 낮은 단계, 높은 단계 이런 구분법을 하고 있는데, 레닌이나 스탈린으로 가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와 관련해서 이행기 사회와 공산주의 낮은 단계 구분이 애매해지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소련에서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 해석을 했고 나중에는 사회주의 생산 양식론도 나오게 된다.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정치를 어떻게 봐야 될 것인지, 그리고 무계급 사회로 이행하는데 있어서 맑스-엥겔스는 폭력 혁명의 필연성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이행의 가능성도 열어놓고 논의를 했었다. 레닌이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 폭력 혁명이 필연적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러시아 상황속에서의 하나의 전술이었는데, 스탈린은 이것을 일반화하였다. 또한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당 독재가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당 독재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당 독재’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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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0월,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러시아혁명 2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모습> 

 

2기 4강 소개 [트로츠키]

 

* 강의 자료 : 배반당한 혁명(1936), 이행기 강령(1938)

* 강의 영상 : https://youtu.be/XnEfizuuks4?si=C2GJuvz7mjRjxr67

 

 레닌이 주로 1917년 혁명을 전후해서 그 당시 존재하던 사회혁명당 등 개량주의자들, 또 다른 반대쪽에서는 좌익 소아병, 아나키스트들과의 논쟁 속에서 자기 이론을 전개했다면,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레닌 사후 소비에트의 권력을 스탈린이 잡아가는 과정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혁명 이후 여러 가지 정책들 중에 특히 화폐와 상품을 어떻게 볼 것인지, 그리고 도시 부분과 농업 부분, 농민을 어떻게 봐야 될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또는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소비에트의 정치를 어떻게 봐야 될 것인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출신으로 그 당시 있었던 볼셰비키 중에는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내전 과정에서는 어떤 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트로츠키를 보내 무마하는 역할을 했다. 레닌의 트로츠키에 대한 신뢰가 상당 부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레닌의 유서에는 스탈린이 아닌 트로츠키를 ‘당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단점을 비판, 견제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당을 이끌어 가라는 의도가 담겨있다.

 우리가 사회주의로 부르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첫 번째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 여러 군데 있기 때문에 이행기로 봐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의 소비에트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과정에서 “소련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다, 러시아 혁명의 의미는 있기 때문에 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노동자 국가로 인정을 하고 만약 소비에트와 다른 쪽하고 전쟁이 벌어지면 소비에트 편을 들어야 된다”고 하면서도 이 소비에트 체제가 얼마나 그 볼셰비키의 기본 원칙들을 벗어났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을 하고 있다.

 

2기 5강 종강 소개 및 요약

 

* 강의영상 : https://youtu.be/KDW-E1IlXk4?si=EvMikpVAKnpqky7j

 

 2기 강좌를 종합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것은 계급 지배의 관점이며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 형식과 절차는 더욱 발전시켜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적 폭력’과 ‘평화적 이행’ 또한 각 상황에 맞게 어떤 전술을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행기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고,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라고 규정하면서 ‘사회주의에서의 상품과 화폐의 필요성’ 등의 경제문제에 대한 혼란이 발생한다. 따라서 그러한 혼란을 없애기 위해 맑스-엥겔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행기 사회)’와 새로운 사회인 ‘공산주의 낮은 단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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